[평론] 전체로서의 풍경 - 오광수(미술평론가)
드로잉적이다라고 한다면 어쩐지 작품자체가 현재 진행형이란 의미를 떠올리게 한다. 완결되지 않은 상태란 그 자체가 생동하는 느낌에 차있다. 70년대 이후 현대미술에서 특히 작업상의 프로세스를 대단히 중요시한 풍조가 한동안 만연되었다. 완결한다, 완성한다는 것보다 미완이다, 아직 진행에 있다는 말이 훨씬 유연성을 갖고있을 뿐아니라 풍부한 여운을 남기고 있다.
김호준의 작품에서 받는 인상도 아직 완결되지않은 진행중에 있다는 점이다. 그의 작품이 다분히 드로잉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음도 여기에 기인된다. 드로잉이 진행인만큼 순간순간이 살아숨쉰다. 완결에서오는 고식성이나 관념의 흔적이 전혀 느껴지지않는 생동감이 강하게 작용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가 몇 해전 전시 팜프랫에 적은 다음 언술은 그의 작품에 접근하는데 하나의 길잡이가 되기에 충분하다.
“어떤 여운과 울림에 의한 상상이 가능한 대상에 관심이 있다. 상상은 너머(beyond)에 대한 동경으로 현상(be)의 저편(yond)에 있는 어떤 것을 찾는 과정이다. “ 고 했을 때, 그 찾는 과정이야말로 현재 진행형을 완곡하게 표현한 것이 아닌가 본다. 또 이 언술 속에 “여운과 울림에 의한 상상이 가능한 대상” 이라고 했는데 이 점은 직접적으로 자연과의 교감이 되겠지만 그것은 끝나지않은 진행으로서의 너머의 세계로 향한 도정을 말해준다. 여기에 그의 작품이 지닌 매력으로서 깊은 감동의 여운이 잠재된다.
다음 구절은 자연으로서의 대상이 보다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렇지만 모든 현상이 다 나에게 의미가 있다가보다는 시각적 여운과 울림이 있는 대상이 중요하다. 특히 물, 풀, 숲 등 집합적인 군집의 성격을 띠고 있는 사물에 흥미가 있다. “
군집된 자연현상은 개별로서의 대상이 아니라 전체로서의 대상이고 동시에 전체로서의 풍경이다. 화면엔 풀과 숲이 빽빽하게 차지한다. 나무들로 뒤엉킨 숲, 풀들로 무성한 들판은 하나하나의 대상에로 접근하는 것이 아니고 언제나 전체로서 다가오는 것이다. 그것들이 살아있는 현재형이기에 그의 작품은 드로잉적인 속성을 띠지 않을 수 없다. 오토마틱한 자동기술은 실은 무위의 상태에서 붓이 가는대로 내맡긴다는 것인데 김호준의 드로잉은 단순한 오토마틱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현상으로서 대상을 저버리지 않는다. 그가 바라는 저너머의 그 무엇은 바로 이같은 구체적 현상을 매개로 했을 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대상을 통해 확인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의 화면은 다분히 식물성이란 인상을 받는다. 단순히 숲이 있고 풀이 있다고해서가 아니라 가너린 생명체가 이루는 군집으로서의 강인함이 화면 전체에 더없이 여운이 짙은 울림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수한 시간의 겨와 공간의 폭이 서로 직조되면서 만들어내는 독특한 탄력의 구조에서 연유한다. 이들 풀과 나무들이 화면을 뒤덮어가는 만큼 화면은 전면성의 특징을 두드러지게 드러낸다.
전면성이란 화면에 대한 치열한 인식에서 비롯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가 어떤 대상을 그리든, 어떤 매개를 떠올리든 언제나 평면에로 환원될려는 의지를 지니는 만큼 화면은 어디에도 속하지않는 그 자체로 독립된 존재로 등장하게 된다. 이는 작가가 부단히 자기작업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성찰로서의 의식을 지닐 때만이 기능한 것이기도 하다.
[평론] 점들 사이의 이미지 - 변길현(광주시립미술관 학예연구사)
김호준의 첫인상은 공부만 하는 박사과정생처럼 보였다. 목이 늘어난 하얀 색 라운디 티. 뿔테 안경. 정형화되지 않은 미소. 순수청년 같은 다듬어지지 않은 외모다. 그러나 이번 파주출판도시 레지던스에서 보여주는 그의 그림은 일견컨대 매우 세련된 느낌이었다. 불규칙하지만 랜덤하지는 않은 것처럼 보이는 그 점과 획들 사이에서 무엇인가 어렴풋한 이미지들이 있었다. 내 기억의 저편에 자리 잡고 있었던, 내 존재의 근원과도 같은 이미지들.
그의 첫 번째 개인전인 <Be-yond>전(2005, 도올갤러리)에 나타났던 작품들은 전시회 제목처럼, 존재의 “너머”를 성찰하는 하는 과정이었다. 숨기고 드러내는 데 관심을 둔 그는 물, 풀, 숲 등 군집의 성격을 띠고 있는 사물을 소재로 그 안에 있는 것이 무엇일까 하는 호기심을 드러내는 것이다. 너머를 찾아간다는 것을 그는 “낯선 곳에서 익숙한 기억을 끄집어내는 것”이라고 하는데, 이 행위가 그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단순한 데자뷰 현상을 그리는 것은 의미 없다. 그는 그의 존재를 형성한 요소들이 무엇인가를 궁금해하고, 이것을 작품의 소재로 삼고 있다. 이는 그의 작품 제작의 발상 자체가 극히 시적(詩的)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세상의 근원을 그는 궁금해 하는 것이다.
그는 2006년부터 서울시립미술관 난지창작스튜디오에서 그의 고향에서의 기억을 더듬는 <오륙도> 시리즈를 선보인다. 초창기 오륙도 시리즈는 파란 색 풍의 흑백사진처럼 아스라이 음과 양으로 겹쳐진 오륙도부터, 영도에서 바라본 오륙도, SK 빌딩에서 바라본 오륙도, 서울에서 망원경으로 바라본 것 같은 오륙도까지 그가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보는 고향 오륙도의 모습을 그린다. 말하자면, 그는 여전히 그 “너머”를 천착하고 있는 것이다. 2008년도에 그가 현재 거주하는 곳인 <파주에서 바라보는 오륙도>까지 그린 것을 보면 그의 고향, 그의 너머를 찾는 그의 작업은 작가주의적 시각으로 좀 집요했다.
2009년도부터 그의 작품은 구상적 기억으로서의 오륙도를 벗어나게 된다. 추상적이고 극히 절제된 <psuedorandom>(의사 랜덤, 컴퓨터 용어, 랜덤하나 랜덤하지 않은 것) 시리즈나 <Flower> 시리즈가 그것이다.
<psuedorandom>시리즈에선 우주 속의 무수히 많은 별들처럼, 풀잎들처럼, 쌀알들처럼, 무수히 많은 점들이 랜덤하게 또는 랜덤하지 않게 펼쳐져 있고, 그의 점들 사이에는 보일 듯 말 듯한 이미지들이 있다. 아마 그 이미지의 모양과 내용은 각자의 시각마다 다를 것이다. 그러나 그가 디지털 영상에서 영감을 얻은 이 점들은 그의 첫 번째 개인전에서 보여줬던 존재의 근원을 찾아가는 작업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또한 <Wild Flowers>, <Flower> 작품들은 점들이 하나하나가 꽃이면서, 전체가 하나의 꽃으로 구성된다. 물론 이 꽃들은 그의 기억들이 만들어내는, 그의 기억들이 되고 싶은 꽃들이다. 이 꽃들이 이제 그가 한 사람의 성숙한 작가로 서면서 그가 지향하는 바가 아닐까. 점 또는 꽃을 반복해서 그리는 과정은 화가로서 자기구도의 과정이고, 그 점 또는 꽃들 사이에서 그는 무언가를 찾고자 했다. 정답은 없다. 가슴 속에 아스라이 남는 것. 그 느낌을 보는 사람들에게 주면 된다. 앞선 작품들의 성과와 내공을 바탕으로 한 차원 더 세련된 작품을 보여주고 있는 그의 탐구활동이 그의 무수한 점들 사이에서 어떠한 이미지로 나타날지 기대된다.
[평론] 기억의 적층(積層)으로 재현된 이미지 - 임성훈(미학, Ph. D.)
그림을 그리는 것은 자연스럽고도 구속적인 행위이다. 흔히 그림을 그리면서 자유를 누린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이러한 자유도 지난한 작업의 한 결과로 생겨난 것이다. 그림은 자유과 구속 사이에서 빚어진 삶의 형식들이다. 김호준의 그림도 그렇다. 얼핏 보면 그의 작품은 유연한 붓질로 형성된, 자유로운 이미지로 가득 차 있는 듯하다. 그렇지만 이내 그 자유만큼이나 많은 구속과 제약 속에서 이미지가 제시되고 있음을 직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구속과 제약이란 말은 그림을 그리는 데 따른 어떤 계획, 달리 말하자면 어떤 예술적 의도를 뜻한다. 실상 그림을 그리는 데 있어 예술적 계획이나 예술적 의도는 필연적인 것이다. 그러나 김호준의 그림에는 결코 도식적인 계획이나 의도가 상정되어 있지는 않다. 이런 점에서 그의 그림에 나타난 의도란 “의도하지 않은 의도” 혹은 “우연적인 의도”이다.
우연적인 의도에 따른 하나의 이미지는 또 다른 이미지를 불러온다. 여기에는 ‘그림을 그린다’는 행위의 능동성과 ‘그림이 그려진다’라는 수동성이 절묘하고도 섬세한 방식으로 교차된다. 이는 김호준의 작품 전체에 반영되어 있어, 그가 그리는 이미지는 정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동적인 느낌을 강하게 준다. 또한 화면의 이미지에는 무엇을 그리겠다는 자의식이 반영되어 있지 않다. 이미지들은 그 자체로 완결된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또 다른 이미지들을 연결하는 장소가 된다. 그곳에서 이미지의 무한한 변용이 이루어지고, 그 변용은 기억을 재구성한다.
문화학의 관점에서 보자면 기억은 일종의 저장 개념이다. 기억한다는 것은 그러니까 저장되어 있는 어떤 것을 꺼내어 오는 것, 불러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김호준은 기억의 저장소에 있는 것들을 다시 불러내어 이미지로 구축하는 작업을 하는 작가이다. 캔버스에 기억들이 하나씩 하나씩 쌓여가면서 층이 이루어진다. 이러한 ‘기억의 적층(積層)’에 따라 이미지는 재현된다. 김호준이 제시하는 기억의 적층으로서의 이미지는 다양한 관점에서 고찰될 수 있겠지만, 여기서는 다만 몇 가지 관점, 즉 회상적 이미지, 이미지의 숨바꼭질, 매체적 구상력, 반복의 미학 그리고 생명의 이미지에 주목해서 생각해 보기로 한다.
회상적 이미지
김호준의 작품에 나타난 이미지들은 무질서한 가운데서도 어떤 질서를 갖고 있다. 필연성보다는 우연성에 따라 그려진 이미지이지만 이른바 ‘무질서의 질서’라는 조형의식이 근저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또한 화면 전체적인 이미지는 감성적인 것에 대한 동경과 더불어 지적인 것에 대한 모색을 보여준다. 아마도 김호준은 작업을 하면서 수십 번, 아니 수백 번이나 뒤로 물러나 자신의 그림을 관찰했을 것이다. 무질서의 질서의 이미지는 화면에 마치 흔적인 것처럼 남겨져 있다. 무엇인가를 재현하고자 하는 욕망의 이미지가 아니라 그저 무심히 남아 있는 어떤 기억의 흔적들로서의 이미지가 화면 곳곳에서 적층을 이루고 있다. 마치 책상 서랍에서 한 장의 낡은 사진이나 어떤 사연을 담고 있는 빛바랜 엽서를 꺼내어 들여다 볼 때 떠오르는 회상적 이미지가 형성된다. 그러기에 관람자는 이러한 기억의 적층으로서의 이미지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기억의 적층들은 섬세한 이미지를 형성하기도 하고, 압도적인 이미지로 변용되기도 한다. 이를 통해 관람자를 화면속으로 끌어들이기도 하고 화면 밖으로 밀어내기도 한다.
이미지의 숨바꼭질
그림은 무엇을 재현한다. 그런데 도대체 무엇이 재현될 수 있는가? 김호준의 그림은 이 물음을 끊임없이 던지는 그림이다. 그의 이미지들은 드러나면서도 동시에 숨겨진다. 마치 숨바꼭질을 하는 이미지처럼 드러나고, 숨겨지고, 다시 드러나고, 또 다시 숨겨지는 순환이 반복된다. 이렇듯 드러나는 것과 숨겨지는 것이 상호 교차되어 형성된 이미지는 재현의 본질을 생각하게 한다. 하이데거(M. Heidegger)는 예술작품의 근원을 숨겨져 있는 것이 드러나는 것에서 찾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드러난 것은 다시 숨겨진다. 이렇듯 예술작품의 진리의 계기란 숨겨진 것이 드러나고, 그렇게 드러난 것이 다시 숨겨지는 과정에서 비로소 존재한다.
매체적 구상력
김호준의 회화는 매우 견고하면서도 밀도 있는 구성을 보여준다. 이러한 구성은 상당한 기간 동안 다양한 매체를 실험해 온 결과일 터이다. 판화, 조각, 미디어 등을 통해 매체의 구상력을 끊임없이 모색해왔고, 그러한 모색의 결과가 평면 작업에 적용되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적용은 기법적인 적용이라기보다는 정신적인 적용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기에 김호준은 단순히 이미지를 평면에 구현한다는 식이 아니라 매체적 구상력을 평면에 실현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그는 회화 작가 중에서는 드물게 매체에 대한 자기이해를 평면에서 표현하고자 시도하는 작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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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의 미학
반복이 주는 이미지의 힘은 생각보다 강하다. 회화에서 지속되는 반복은 공간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 공간 속에서 이미지는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 반복은 인내를 요구하는 어려운 작업이다. 그러나 작가는 기꺼이 이러한 반복의 미학을 캔버스에서 재현하고자 한다. 반복은 역설적으로 상당한 변용을 가져오기도 한다. 반복의 이미지는 무엇인가를 잊게 만들면서 동시에 무엇인가를 새롭게 떠올리게 한다. 또한 반복의 틈 사이에 이루어진 예술적 공간은 일상의 편린들이 자리잡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작품에 나타난 반복성은 강박관념이 아니라 상상력의 힘을 부여한다. 그리고 그 상상력은 생명감의 차원으로 고양되고 있다. 반복은 생명이다. 반복이 중단되면, 그의 작품에서 이미지들은 분리되고 화면 전체는 죽어버리고 말 것이다.
생명의 이미지
김호준은 일상적인 풍경-이미지가 아니라 일종의 유닛(unit)들을 연결한 풍경-이미지를 보여준다. 화면의 유닛들은 우연적이거나 혹은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있어 억지스러운 이미지를 형성하지 않는다. 풀, 바람, 꽃, 바람 등과 같은 예술적 유닛은 화면 전체에 생명의 이미지를 형성한다. 특히 포자(胞子)는 생명의 이미지를 구현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화면 전체의 분위기를 좌우하는 포자의 이미지는 원시적이며 상징적일 뿐만 아니라 미술의 정신성을 드러내고 있다. 생명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말라 비틀어져 흩어져야 하는 비극적이면서도 환희에 찬 포자의 이미지는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강력한 생명의 층위를 보여준다.
김호준의 그림을 보면서 떠오르는 몇 가지 생각을 여기에 적어보기는 했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아직도 남아 있는 이야기는 많이 있다. 남아 있는 이야기를 읽어내는 것은 오롯이 관람자의 몫이다. 이제 기억의 적층으로 재현된 이미지, 그 떨림이 막 시작되고 있다.